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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항일 여성운동의 대모,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김마리아"

by 구름과 비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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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일찍이 기독교로 개화한 만석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김마리아 동상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보라매청소년수련관 앞에는 '혁명 여걸' 김마리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마리아가 자란 소래마을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내린 곳이었으며, 1896년부터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 소래학교도 아버지 김윤방이 세운 기독교 학교였다.

김마리아 집안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 집안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가 1905년에 서울로 올라와 기거한 삼촌 김윤오의 집과 김윤오가 운영하던 김형제상회는 항일운동의 연락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또 다른 삼촌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전 출신 의사로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으며, 김규식, 노백린, 이동휘, 유동렬 등 애국지사들과 敎諭한 항일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4명의 고모 중 김구례는 신한청년당의 당수를  맡았던 독립운동가 서병호와 부부 사이였고, 나중에 임시정부의 부주석을 맡게 되는 김규식 박사와 부부 사이였던 김순애는 신한청년당 이사와 3.1 혁명 직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다.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 단체였던 근우회 등에서 활약한 김필례도 김마리아의 막내 고모였다. 이런 배경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김마리아는 기독교계 항일여성운동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김마리아, 2.8 독립선언과 3.1 혁명에 앞장서다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재주가 비상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막내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어머니도 1904년 운명할 때 삼 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라도 끝으로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키라고 유언했을 정도다.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한 후 1914년 스물셋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에도 김마리아는 여성 조직에 적극 나서는데, 1917년에는 고모 김필례에 이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에 선출된다. 이때 기관지로 발행한 女子界는 남녀평등사상에 기반한 여성운동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한다.

김마리아의 독립운동은 1919년 동경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던 상황에서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2.8 독립선언 대회)에 참석한 김마리아는 행사 직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지만, 풀려나자마자 이를 확산시키고자 2.8 독립선언서를 몰래 국내로 가지고 들어온다.

귀국한 김마리아는 여성계,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 다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동경 유학생들의 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대대적인 민족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 김마리아는 3.1 혁명 당시 황해도 해주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정신여학교 학생들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다.

김마리아는 왜성대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찜질을 당하는가 하면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짓이겨지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하지만, 이를 이겨내면서 5개월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이때 생긴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은 고질병이 돼 김마리아를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게 한다.

최초의 비밀 여성조직,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회장 김마리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부터 다시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회장에 선출된다.

경성에는 3.1 혁명 직후인 4월부터 독립운동 과정에서 감옥에 간 지사와 그 가족의 구호를 위한 조직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 회장 오현주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 회장 김원경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3.1 혁명의 결과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면서 점차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여성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오현주를 회장으로 조직을 통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열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조직도 지지부진해지자 출옥한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세워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전국 조직으로 새롭게 만들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면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불과 한 달 만에 6000여 원을 모금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김마리아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할 당시 어떤 생각으로 임했는지는 1919년 9월 자신이 작성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古語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가족의 집이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성립하지 못하고 나라는 국민의 나라이라 국민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를 보존치 못할 것은 愚夫愚婦라도 밝히 알리로다. (중략)

오호라.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로 본 회가 설립된 지 수년 이래로 적의 압박을 입어 어떠한 곤란과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은근히 단체를 이루며 비밀히 규모를 지켜 장래의 국가 성립을 준비하다가 독립국 곤란 중에 부인도 十에 二가 참가하여 세계의 公眼을 놀라게 하였으나 이것에 만족함이 아니요,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기로 표준 삼고 전진하며 후퇴하지 아니하니 국민성 있는 부인을 용기를 함께 분거하여 이상을 상통할 목적으로 단합을 위주하여 일제히 찬동하심을 천만 위망하나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마리아, 황에스더, 이혜경 등 3인이 작성한 본부규칙을 보면 된다. 특히 제2조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국 국권을 확장케 함'이라고 정한 대목과 제28조 본 회원은 회에 대한 일체 사항의 비밀을 엄숙히 지킴'이라고 한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여성운동의 사적 고찰을 게재한 견원생은 조선의 여성운동을 3개 시기로 나눴는데, 제1기를 애국부인회 활동기로, 제2기를 여성동우회 활동기로, 제3기를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의 활동기로 나눠 설명한다.

1년 후인 1929년 동아일보 최의순 기자는 신년특집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 10년간 조선 여성의 활동에서 여성운동의 역사를 배태기, 활약기, 침체기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립에서부터 각 지방의 여성청년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배 타기로 규정한다.

분류법은 다를지라도 두 기사 모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여성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제1기 또는 배태기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의 혹독한 고문도 이겨낸 혁명 여걸 김마리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임회장 오현주가 독립의 희망을 잃고 중국에서 돌아온 남편 강낙원의 영향을 받아 변절하면서 일본 경찰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1919년 11월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아 간부들이 연행되면서 무너지고 만다. 이때 김마리아 역시 체포돼 종로서를 거쳐 대구로 이송된 후 다시 한번 혹독한 고문과 함께 구속 수감된다.

정신여학교에서 김마리아와 함께 잡혀 대구로 이송된 애국부인회 서기 김영순(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 제자이자 당시 기숙사 사감)의 증언에 따르면, 김마리아는 이송되는 기차 안에서도 차분히 우리가 지금 잡혀는 가지만, 그들이 알고 묻는 것은 대답하되, 모르고 묻는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면서 김영순, 장선희, 신의경 등 동지들의 각오를 다지게 하고, 심문 과정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는다.

또한 웃으면서 나는 몸이 약한 김 선생이 제일 걱정스러워, 한 번만 얻어맞으면 다 말한 것 같다고 말해 김영순을 격려하기도 한다. 이에 김영순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

김마리아와 동료들은 조직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조사과정은 물론 재판과정에서도 인격수양과 여성교육을 보급하는 단체인데, 시류에 편승하려고 단체 명칭이나 취지서에 대한민국이나 국권확장과 같은 표현을 썼을 뿐이라고 맞선다. 결국 연행된 52명 중 4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방면됐고, 핵심간부 9명만 기소된다.

왜성대에서 김마리아를 심문한 바 있는 가와무라 검사가 대구로 옮겨오기까지 하면서 혹독한 수사를 벌인 일제는 안재홍의 대한청년 와 교단과의 관련성까지 캐내기 위해 김마리아에게 고춧가루를 탄 물고문을 실행했다.

심지어 성고문까지 자행한다. 이때 김마리아는 너희가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고 되뇌며 이겨낸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3.1 혁명 직후 구속되어 당한 고문후유증인 메스토이병이 악화된 데다 극도의 신경쇠약까지 더해져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 세브란스 의전의 스코필드 박사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고문에 대해 직접 항의하는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병이 위중한 김마리아는 결사 부장 백신영과 함께 보석으로 석방된다.

박헌영 조선 탈주 사건에 비견되는 김마리아의 조선 탈주 사건

1925년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박헌영이 감옥에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병보석으로 나온 후, 1928년 12월 만삭인 부인 주세죽과 함께 조선을 탈출한 사건은 일본제국의 허를 찌른 통쾌한 사건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1921년 김마리아의 조선 탈주 사건 역시 박헌영의 조선 탈주 사건 못지않게 드라마틱했다. 병보석 상황에서 1920년 6월 7일에 시작된 재판은 1921년 6월 20일 고등법원의 판결과 곧 이은 대법원의 기각으로 3년형이 확정되기까지 무려 1년여나 계속된다.

이 기간 건강을 많이 회복한 김마리아는 1921년 6월 29일 마침내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자마자 인천으로 가서 중국인으로 가장한 뒤 배를 탔다.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극적인 탈출의 뒤에는 선교사 매큔의 도움과 김마리아 등의 탈출을 돕기 위해 파견된 임시정부 특파원 윤응념의 활약이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금릉대학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192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황해도 의원을 맡았다. 여성 최초의 임시의정원 의원이기도 했다. 

다음 해에는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통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를 추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김마리아는 희망을 잃지 않고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꿈꾸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김마리아의 미국 유학과 귀국, 끊이지 않는 언론의 핫이슈

순국열사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미국에서 파크대학을 거쳐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콜롬비아대 사범대학원과 뉴욕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김마리아가 미국에서 그렇게 공부에 매진한 이유는 조선으로 돌아가 여성계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마리아는 1928년에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해 대표를 맡았고, 1929년에는 흥사단에도 가입해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마리아는 조선 탈출 사건의 법정 시효 10년이 지나자 장로교선교회를 통해 귀국을 타진한 끝에 1932년 7월에 이르러 경성 거주 제한 등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귀국을 결정한다.

당시 김마리아의 귀국은 언론의 대단한 관심사였다. 김마리아 양의 근황 및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차고 넘는 인생의 쓴잔'이라는 제목으로 김마리아의 편지를 실은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는 물론이고, 전애국부인단장 김마리아 양 귀국이라는 이름으로 귀국보도를 하고 화제의 김마리아 양을 3회에 걸쳐 연재한 동아일보 등 김마리아의 귀국 소식은 한동안 언론의 핫이슈였다.

경성에서는 대대적인 환영회도 여러 차례 열리는데, 정신여학교 동창회에서는 한강인도교 밑에서 뱃놀이를 함께 즐기는 것으로 김마리아 환영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원산의 마르타월슨 여자신학원에서 교수로 조선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김마리아는 성경 강의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적 기독교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회 내 남녀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선기독교여성운동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여전도회 회장을 맡아 여성의 역할을 높이는 활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1937년부터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가 본격화되면서 장로회 총회마저 굴복한 상황에서도 김마리아가 이끈 여전도회는 이를 끝내 거부한다. 김마리아로서는 신앙적 입장에서도, 민족적 입장에서도 수용할 수 없는 일이 없다. 이로써 1943년에는 마르타 윌슨 신학원마저 문을 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마리아는 강화된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 건강이 다시 악화됐고, 1943년 겨울 혈압으로 쓰러진다. 김마리아는 수양딸 백학복이 일하고 있는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벧전 중 광복을 불과 1년을 앞둔 1944년에 그만 순국하고 만다. 김마리아의 나이 53세 때였다.

김마리아의 주검은 화장해 대동강에 뿌려졌다.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무후 선열제단에는 혁명여결 김마리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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