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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

[역사] 3.1운동의 민족대표 33+1인 푸른 눈의 외국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by 구름과 비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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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푸른 눈의 외국인 한 명을 더하여 민족대표 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민족대표 33+1인 푸른 눈의 외국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고발한 사람이기도 하며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얽힌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의 활동을 소개한다.

1919년 3.1 운동은 역사적으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높은 사건이며, 정치가가 잃은 나라를 국민이 나서서 되찾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다. 정치가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무능했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한 사례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 사건에는 조선인도 아닌 독립운동에 참여한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으니, 이 분이 33+1번째 민족대표로 알려진 프랑크 스코필드 박사이다. 또한 그는 한국식 이름을 석호필로 정한 것에는 깊은 듯이 있다.

그는 스코필드의 음을 따서 반드시 좋아한다는 뜻을 가진 石好必로 지었지만, 조선의 비참한 현실에 공감하고는 조선을 돕겠다는 의지로 용맹하게 돕는다는 뜻을 가진 石虎弼로 바꿔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에 온 프랭크 스코필드

3.1 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 조선에 온 프랭크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제약부에서 일하던 이갑성을 알게 됐다.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

이갑성은 외군인이 알 수 없던 불행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이야길 했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함께 분통해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다. 3.1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외국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는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 3.1 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갑성은 외국인이 알 수 없던 불행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이야기했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함께 분통해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서 3.1 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노력했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고립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조선도 동의해서 합방을 한 것으로 흥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3.1 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해기에 이갑성은 학생시위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전단지를 뿌리며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에게 부탁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이갑성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그동안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이 상황을 사진으로 남겨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민족대표 33+1인으로 불리게 됐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제암리 학살사건 사진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로 알리다.

1919년 3월 31일,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인 제암리에서는 장날에 모인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은 천도교, 유학파, 전도교,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했는데,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다가 주민 천여 명과 함께 일제의 관청을 부수기도 했던 민중운동이다.

그런던 중 인근 수촌리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수촌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마을에 방화하여 대부분을 불타게 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 소식을 서울에까지 알려졌지만 일본은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소식을 접한 스코필드 박사와 선교사, 영국 공사관, 기자 등 외국인들이 직접 확인하려 출발했고 스코필드 박사와 외국인 일행들은 수촌리를 방문했을 때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됐다. 즉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접한 것이다.

제암리 사건은 일본 경찰이 제암리 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일 이 발생했다. 며칠 후 일본군은 제암리를 방문하여 진압과정에서 과격한 폭력을 가한 것을 사과한다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의 기회를 갖자고 제의했다.

처음부터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일본군의 계획적인 흉계였다. 이날 일본군은 15세 이상의 마을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고. 일본군 장교가 교회에 들어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몇 마디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나와 교회를 포위하고 대기하던 일본군들에게 집중사격하게 하고, 기름을 부은 후 불을 질러 학인 사살까지 저질렸다.

스코필드 박사와 외국인들은 급히 제암리 확살사건의 현장으로 향해 참담한 만행에 충격을 받았고, 일행들은 3.1 운동 때처럼 이를 기록하여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 사진과 사연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수원 잔악행위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

제암리 사건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없었다면 세계가 일본의 말만 믿고 주민들의 원통한 죽으로 잊힐 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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